[뉴스에프엔 조남준 기자] 핵융합은 수십 년간 ‘궁극의 청정에너지’라는 수식어와 함께 인류의 기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기술적 성취만으로는 상용화를 보장할 수 없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공과대학교(TU/e)는 최근 일련의 연구를 통해 핵융합 개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했다. 이들은 “과학적 난제 해결에 매몰된 접근에서 벗어나, 시장성과 사회적 가치까지 반영한 전략적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셔터스톡/렌딕스 알렉스티안
■ 과학 주도에서 ‘가치 주도’로
전통적인 핵융합 개발은 대형 실험로 건설과 물리학적 성과 달성에 치중해왔다. 하지만 TU/e 연구진은 “이런 선형적 접근은 상용화 시기를 늦추고, 저비용 재생에너지에 밀릴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제안하는 가치 주도(value-led) 전략은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가치 기반 연구개발 – 실험과 설계가 시장 진입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경제성과 사회적 수요를 지표로 삼는다.
병렬 혁신 – 단일 프로젝트 대신 다양한 소규모 개념을 동시에 추진해 학습 속도와 실패 대응력을 높인다.
연료 공급망 선제 구축 – 리튬-6 확보를 포함한 연료 체계까지 개발 초기 단계에서 전략적으로 준비한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과학적 진보를 넘어, 핵융합이 실제 에너지 시장에서 경쟁 가능한 기술로 자리잡기 위한 토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병렬 혁신: 학습 속도를 끌어올리다
기존 대형 실험로 방식은 건설에 10~15년 이상이 소요돼, 기술 학습 주기가 지나치게 길었다. 이 과정에서 혁신 속도는 지체되고, 초기 설계에 갇히는 ‘기술 잠금(lock-in)’ 위험도 커졌다.
이에 TU/e는 복수의 소형·모듈형 실험로를 병렬적으로 운영해 지식을 빠르게 축적하고, 실패 가능성을 분산시키며, 경쟁적 혁신을 촉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민간 핵융합 스타트업이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 “10년 내 성과”를 내세우며 빠른 실증을 추진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 리튬-6 병목: ‘보이지 않는 제약 조건’
핵융합의 기술적 성공이 반드시 상용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장 큰 잠재적 병목은 연료 공급망이다. 중수소-삼중수소 반응을 위한 삼중수소는 리튬-6에서 생성되지만, 현재 산업적 생산 능력은 사실상 전무하다. 과거 사용된 수은 기반 분리법은 환경 문제로 금지되었고, 대체 기술은 초기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각 발전소는 수 톤 단위의 리튬-6을 필요로 하며,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발전소 가동은 불가능하다. TU/e 연구진은 “리튬-6 확보는 단순히 비용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라며, 레이저 분리 등 차세대 기술과 글로벌 공급망 협력이 시급하다고 경고한다.
■ 전략적 현실주의가 요구되는 시점
TU/e의 비전은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활용을 고민한다”는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시장·자원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는 전략적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연구진은 “앞으로 10년이 핵융합의 운명을 결정할 분수령”이라며, 공공 연구 프로그램 또한 민간처럼 기민하고 가치 지향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핵융합이 실험실을 넘어 사회적 자산으로 자리잡으려면, 단순한 기술 성취 이상의 시장 적합성·공급망 안정성·혁신 속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TU/e의 ‘가치 중심 전략’은 이러한 조건을 종합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국제 핵융합 논의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