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프엔 김규훈 기자] 영국의 핵폐쇄(decommissioning) 정책이 협력과 기술 혁신을 축으로 중대한 전환점에 들어섰다. 영국 원자력청과 핵폐기청이 공식 파트너십을 출범시키고, 셀라필드에서 플루토늄 유산을 안정적 폐기물 형태로 전환하는 첫 성과를 내면서, 과거 핵문제 해결과 미래 핵융합 시대를 동시에 겨냥한 국가적 대응이 본격화되고 있다.
핵폐쇄 ‘속도전’… UK Atomic Energy Authority–Nuclear Decommissioning Authority 공식 협력
영국 원자력청(UKAEA)과 핵폐기청(NDA)은 수년간 이어져 온 협력과 지식 교류를 제도화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영국 전역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핵시설 폐쇄·정화 사업 전반에 걸쳐 모범 사례 공유, 기술 혁신, 비용 효율성을 가속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NDA는 영국 내 17개 초기 핵시설의 정화·폐쇄를 총괄하고 있으며, 이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고난도 사업으로 평가된다. 양 기관은 핵분열과 핵융합 분야에서 축적된 경험을 상호 이전해 위험 관리 고도화, 장기 성과 개선을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NDA 그룹의 핵전략 책임자인 클라이브 닉슨은 “복잡성이 극단적으로 높은 환경에서 UKAEA와의 협력은 공통 과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이라며 “납세자 효율을 높이고 사명 달성을 앞당길 것”이라고 밝혔다.
JET 폐쇄, 미래 핵융합의 ‘교과서’ 되나
협력의 핵심 사례는 UKAEA가 운영해 온 세계적 핵융합 연구시설 Joint European Torus(JET)의 폐쇄 과정이다. JET는 플라즈마 운영을 마치고 폐기·재활용 단계로 전환하면서, 초기 기획부터 NDA의 검증된 폐쇄 노하우를 내재화하고 있다.
NDA 전문가들은 폐기물 처리 경로 설정, 규제 준수, 처리 인프라 구축을 지원해 왔으며, 이는 폐쇄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차세대 상업용 핵융합 발전소의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로보틱스·AI로 잇는 핵분열–핵융합
이번 파트너십은 일방향 이전이 아니다. JET에서 개발된 기술과 기법은 NDA가 관리하는 일부 현장에도 적용될 전망이다. 양 기관은 이미 RAICo(로보틱스·인공지능 협력)를 통해 자동화·디지털 도구가 핵폐쇄의 안전성과 생산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는지 실증하고 있다. 이는 유해 폐기물 관리, 원격 처리, 장기 정화라는 핵분열·핵융합 공통 과제를 동시에 겨냥한다.
셀라필드서 ‘플루토늄 유산’ 첫 해법
정책 협력과 함께 Sellafield에서는 상징적 성과가 나왔다. NDA 그룹은 플루토늄 잔류물 캔을 최초로 안정적인 폐기물 형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역사적 연료·자재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약 400캔의 잔류물을 처리하는 프로그램의 출발점으로, 기존 시설을 활용해 신속한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음 과제: 민간 분리 플루토늄 ‘영구 무력화’
이제 시선은 영국의 전체 민간 분리 플루토늄 재고로 향한다. 정부가 2025년 1월 의뢰한 무력화 프로그램은 플루토늄을 안정적 형태로 고정해 향후 지질 처분시설에서 영구 관리하는 것이 목표다. 5년간 1억5,400만 파운드의 정부 지원이 투입되며, 주로 컴브리아 지역에서 약 100개 일자리가 창출될 예정이다.
NDA 그룹의 데이비드 피티 CEO는 “정책 발표 12개월 내 달성한 이번 이정표는 영국 최초의 성과”라며 “수십 년에 걸친 과제이지만, 이번 진전은 미래 세대를 위한 안전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핵폐쇄 가속, 플루토늄 유산 해결, 핵융합 미래 준비를 단일 전략선으로 묶고 있다.
UKAEA–NDA의 제도적 결합과 셀라필드의 실질 성과는, ‘과거의 위험을 정리하면서 미래 에너지를 준비하는’ 영국형 핵정책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