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프엔 김맹근 기자] 유럽이 탈탄소화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을 가속화하면서, 에너지 저장 기술이 전력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한때 틈새 기술로 간주됐던 에너지 저장 장치는 이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핵심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유럽 에너지 저장 협회(EASE)의 정책 책임자 자코포 토소니(Jacopo Tosoni)는 “에너지 저장은 재생에너지의 안정적 통합, 가격 안정, 에너지 안보 확보에 필수적인 기술”이라며 “유럽 내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과 탄력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EASE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 EMMES 9.0에 따르면, 2024년 유럽의 에너지 저장 설치 용량은 89GW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급증은 ▲배터리 가격 하락 ▲정책 지원 확대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저장 수요 증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토소니는 “배터리 시스템의 가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하락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업성과 경제성이 크게 개선됐다”며 “보조 서비스 시장 접근 등 제도 개선도 투자 확대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에너지 저장 장치는 단순히 전기를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저장된 전력은 수요가 높은 시간대에 방출돼 전력망의 부하를 완화하고, ▲그리드 혼잡 해소 ▲전압 품질 향상 ▲정전 예방 등 그리드 안정성 확보에도 기여한다.

토소니는 “최근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그리드 사고 이후, 정책 입안자들과 투자자들이 에너지 저장의 ‘시스템 서비스’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에너지 저장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양수 수력 발전은 빠르게 배터리 기반 저장 시스템(BESS)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EASE는 “2025~2026년 내로 BESS가 총 설치용량에서 양수 수력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산업용 장기 저장, 주택용 단기 저장 등 다양한 니즈에 맞춘 기술이 등장하면서 에너지 저장 시장의 기술 스펙트럼도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트렌드 중 하나는 태양광, 풍력 등재생에너지 발전소와 저장장치의 공동 배치(Co-location)다. 이는 감축(Curtailment)을 줄이고, 낮은 전기요금 시간대에 전기를 저장해 가격이 오를 때 공급함으로써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토소니는 “태양광 프로젝트에서는 저장장치 병행이 이제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며 “마이너스 전력 가격 현상이 잦아진 시장 환경에서 저장장치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폭발적인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장벽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토소니는 “국가별 허가·연결 절차 지연과 행정 관료주의가 스토리지 확산의 병목”이라며, EU 및 회원국 차원의 규제 개선을 촉구했다.

특히 네트워크 요금이 저장장치 운영 비용의 최대 40%를 차지하는 상황에 대해 “이 요금 체계는 저장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요금 체계의 전면 개편 필요성을 강조했다.

EASE는 에너지 저장이 산업용 전력 수요와 연계되며 또 다른 성장동력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렴한 재생에너지를 저장해 산업 공정에 활용하거나, 유휴시간대 전력을 그리드에 재공급하는 방식이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소니는 “향후 산업 부문에서 저장 솔루션을 활용한 전기화가 본격화되면, 에너지 저장 시장은 또 한 번 도약할 것”이라며 “정책적·재정적 지원이 이에 속도를 붙일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