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프엔 김익수 기자] 기후 변화와 재생에너지 전환의 가속화 속에 유럽 전력망은 유례없는 불안정성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최근 영국과 스페인, 포르투갈,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잇따른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하면서, 배터리 에너지 저장 시스템(BESS)과 분산형 전력 복원력 확보의 필요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외신을 종합하면 최근 Socomec의 엔지니어링 설계 책임자 크리스토프 알베르투스(Christophe Albertus)는 “현장 중심의 에너지 관리와 분산화 전략은 대규모 정전을 막는 새로운 방어 수단이자 경제 회복력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에 따르면 2024년 기준 EU 전력 생산의 약 47%는 재생에너지원으로부터 나왔다. 영국의 경우도 절반 이상이 태양광과 풍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급속한 변화는 그리드의 주파수 안정성과 시스템 관성 상실을 야기해, 갑작스런 주파수 변동과 정전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특히 태양광·풍력은 전통적인 교류(AC) 발전소와 달리 회전형 터빈이 없어 내장된 물리적 복원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발생한 ‘주파수 드리프트’는 전력 품질 저하, 전기장비 손상, 광범위한 공급 중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에서 발생한 정전은 정유소, 공장, 호텔, 식료품점 등 산업·상업 전반에 영향을 주며 GDP 손실만 약 16억 유로에 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업계는 배터리 기반의 에너지 저장과 마이크로그리드 구축을 통해 분산형 복원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스마트 BESS 시스템은 단순한 비상전원 역할을 넘어, 전압과 주파수 조절, 아일랜드링(독립운영), 블랙스타트(30초 내 재가동) 기능까지 수행하며 본격적인 ‘전력의 엣지 컴퓨팅’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중앙집중식 그리드의 한계를 보완하며, 특히 대형 에너지 수요처의 자체 전력 수급 안정성 확보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한 전기차(EV) 충전 사업자는 태양광 PV와 BESS를 결합해 39개 초고속 충전소에 독립형 전원을 공급, 네트워크 연결이 어려운 지역에서도 안정적인 EV 충전을 가능하게 했다.
BESS 기반 시스템은 경제성 측면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피크 시간대 전기 사용량을 줄이는 ‘피크 셰이빙(peak shaving)’ 전략은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며, 일부 유틸리티 기업은 이 시스템에 대해 전압 조정·주파수 안정화 등 보조서비스 비용을 지급하기도 한다.
향후에는 소규모 사업자와 건물 소유주를 위한 ‘복원력 구독형 서비스(Resilience-as-a-Service)’ 모델도 확산될 전망이다. 고급 에너지 모델링을 통해 개별 건물의 에너지 수요와 발전 역량에 맞춘 맞춤형 BESS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으며, 여름철 혹서기나 비상시 그리드와의 재동기화를 자동화함으로써 운영 리스크를 최소화한다.
디지털 시대에 데이터 보호를 위해 엣지 컴퓨팅이 도입됐듯, 에너지 시스템도 '엣지 전기(edge electricity)'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건물이나 산업 단위에서 에너지를 생산·저장·관리하는 분산형 구조로, 중앙 그리드에 의존하지 않고도 전력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유럽 전역에서 가속화되는 전력망 불안정성은 단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경제·안보·기후 정책이 결합된 구조적 과제다. 이에 따라 유럽 산업계는 단순히 에너지를 생산하는 수준을 넘어, 복원력을 설계하고 상업화하는 새로운 시장을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