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프엔 김익수 기자] 영국의 핵폐쇄(decommissioning) 정책이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기존 핵시설 정화와 플루토늄 유산 문제 해결, 나아가 미래 핵융합 발전의 토대 마련을 목표로 한 기관 간 협력이 본격화되면서, 영국 원자력 분야 전반의 구조적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영국 정부 산하 UK Atomic Energy Authority(UKAEA)와 Nuclear Decommissioning Authority(NDA)는 최근 핵폐쇄 분야 전반에 걸친 협력을 공식화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수년간 이어져 온 비공식적 협력과 지식 공유를 제도적으로 확장해, 영국 내 최대 규모의 핵폐쇄 프로그램에서 혁신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다.

NDA 그룹 핵전략 책임자인 클라이브 닉슨은 “NDA는 세계에서 가장 경험 많고 숙련된 원자력 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보적으로 복잡한 환경 속에서 핵폐쇄 해법을 선도하고 있다”며 “UKAEA와의 협력은 공통 과제를 해결하고 납세자 효율성과 사업 속도를 동시에 높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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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T 폐쇄 경험, 미래 핵융합 기준으로

이번 협력의 핵심 사례 중 하나는 UKAEA가 운영해 온 세계적 핵융합 연구시설인 Joint European Torus(JET)의 폐쇄 과정이다. JET는 플라즈마 실험을 종료하고 현재 폐쇄·재활용 단계로 전환 중이며, 이 과정에서 NDA의 핵폐쇄 전문성이 계획 초기부터 적극 반영되고 있다.

JET 폐기·재활용(JDR) 팀은 NDA의 경험을 바탕으로 폐기물 처리 경로, 규제 대응, 처리 인프라 설계 등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JET의 폐쇄는 단순한 시설 종료를 넘어, 차세대 상업용 핵융합 발전소를 포함한 미래 핵융합 시설의 폐쇄 기준을 정립하는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AI 기반 핵폐쇄 기술, 양방향 확산

이번 파트너십은 일방적인 기술 이전에 그치지 않는다. 핵융합 환경에서 개발된 기술과 기법은 핵분열 기반의 기존 핵시설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두 기관은 로봇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RAICo(Robotics and AI Collaboration) 프로그램을 통해 원격 처리, 자동화, 디지털 기반 핵폐쇄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이는 고위험 폐기물 관리, 원격 작업, 장기 현장 정화 등 핵융합과 핵분열이 공유하는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접근으로 평가된다.

셀라필드, 플루토늄 처리 ‘영국 최초’ 성과

기관 간 협력 강화와 함께 NDA 그룹은 영국 핵정책의 최대 난제 중 하나로 꼽혀 온 플루토늄 유산 처리에서도 중대한 성과를 거뒀다. NDA는 Sellafield 부지에서 영국 최초로 플루토늄 잔류물 캔을 안정적인 폐기물 형태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번 성과는 과거 연료 및 핵물질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약 400캔의 플루토늄 잔여물을 처리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출발점이다. 해당 작업은 1980년대 중반부터 안전하게 운영돼 온 기존 시설을 활용해 이뤄졌으며, 신규 설비 구축보다 기존 인프라 재활용이 더 신속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다음 과제는 ‘전량 무력화’

NDA가 직면한 다음 과제는 영국 전체 민간 분리 플루토늄 재고를 영구적으로 무력화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2025년 1월 정부가 공식 의뢰한 이 사업은 플루토늄을 안정화해 향후 지질 처분시설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국 정부는 5년간 총 1억5,400만 파운드의 예산을 지원할 예정이며, 이 사업을 통해 컴브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된다.

NDA 그룹의 데이비드 피티 CEO는 “이번 플루토늄 처리 성과는 NDA 그룹의 전문성과 혁신 역량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정표”라며 “완전한 무력화까지는 수십 년이 걸리겠지만, 정책 결정 이후 12개월 만에 첫 성과를 낸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플루토늄 문제 해결은 앞으로도 NDA의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며, 정부의 지속적인 투자와 함께 미래 세대를 위한 안전한 영국을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