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프엔 조남준 기자] 진공은 비어 있지 않다. 현대 물리학은 이 당연해 보이는 상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진공, 즉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여겨졌던 그곳이 사실은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자 요동’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상상을 뛰어넘는 양자 진공의 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도전이, 지금 전 세계의 초강력 레이저 실험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진공의 실체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진공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모든 힘과 입자를 담당하는 양자장이 배경으로 깔린 공간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쌍으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가상입자’들이 끊임없이 출몰한다. 이들은 직접 관측되지는 않지만, 전자기장 변화나 입자 간 간섭을 통해 그 존재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문제는 이 현상이 너무도 미세하다는 데 있다. 일반적인 실험 장비나 환경에서는 진공 속 가상입자의 영향을 포착하기 어렵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물결을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진공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서 활동한다.
진공을 흔드는 초강력 레이저
과학자들이 주목한 도구는 ‘레이저’다. 그것도 수 페타와트(PW) 급의 초고출력 레이저. 이 빛은 더 이상 단순한 광선이 아니다. 극도로 집중된 에너지는 진공 속 전자기장을 강하게 뒤흔들고, 그로 인해 가상입자와의 상호작용이 현실 세계로 투사된다.
실제로 이러한 환경에서는 진공 속에서 빛의 굴절률이 달라지거나, 빛의 경로가 휘어지는 ‘진공 이중 굴절(vacuum birefringence)’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충분한 에너지 밀도가 축적되면 진공에서 실제 전자-양전자 쌍이 생성되는 ‘진공 쌍생성(pair production)’도 가능하다고 예측된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곧 ‘진공이 반응했다’는 물리학적 신호로 보고 있다.
지상에서 우주의 극한을 재현하다
초강력 레이저 실험은 단순히 진공의 성질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실험은 우주의 극한 환경, 예를 들어 블랙홀 주변의 고중력장이나 초신성 폭발 현장의 고에너지 밀도를 지상에서 재현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미국의 ELI-NP, 유럽의 XFEL, 일본의 SACLA 같은 대형 레이저 시설에서는 이런 실험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우주적 현상의 ‘축소판’을 지구 위 실험실 안에 구현하고,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우주의 현상을 관측 가능한 수준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실험이 여는 새로운 물리학의 문
양자 진공 실험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도전장을 던진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중력과 양자장이 결합된 새로운 이론, 이른바 ‘통일 이론’으로 가는 열쇠가 이 진공 실험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고에너지 입자 가속기 없이도 진공을 조작해 입자를 생성할 수 있는 실험 방식은, 미래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한때는 이론 속에만 존재했던 진공의 변화를 직접 관측하는 시대가, 서서히 그 문을 열고 있다.
“빈 공간”의 재정의
우리는 오랫동안 진공을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그것이 오히려 ‘가장 많은 것들이 잠재된 공간’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세계를 깨우는 열쇠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극한의 빛, 바로 레이저다.
진공을 흔들고, 가상입자를 현실로 드러내려는 이 실험은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선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과학의 시선, 존재하지 않는 것에 흔적을 새기려는 기술의 야망이 만나는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우주를,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다시 쓰고 있다.